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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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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12세기 일본의 무장으로,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는 무사시국에서 태어나 시나노 국에서 성장했으며, 다이라 씨에 대항하여 봉기하라는 미나모토 씨의 부름에 응하여 겐페이 전쟁에 참전했다. 구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승리하며 교토를 점령했으나, 고시라카와 상황을 체포하고 괴뢰 정권을 수립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사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공격을 받아 아와즈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가마쿠라 시대의 서사시인 '헤이케 이야기'와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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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나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시나카 (도쿠온지 소장)
이름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다른 이름기소 요시나카, 기소 지로, 아사히 쇼군
생년1154년
사망일1184년 3월 4일
국적일본인
직업사무라이 영주
가문미나모토 씨
묘소시가현 오쓰시 아사히 산 기나카데라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호칸지 (목 무덤)
나가노현 기소군 도쿠온지
가계
아버지미나모토노 요시카타
어머니유녀 (고에다 고젠?)
양아버지나카하라노 가네토오
형제자매미나모토노 나카이에, 미야기쿠히메
배우자정실: (미상)
첩: 도모에 고젠?
자녀요시타카
요시시게?
요시모토?
요시무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첩 (다케고쇼 어머니)?
관직
관위종4위하, 좌마두, 에치고노카미, 이요노카미
직책정동대장군

2. 생애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무사시 국에서 태어났으나, 1155년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카타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에게 살해당하자 시나노 국 기소(木曾) 지방으로 피신하여 성장했다.[1][5] 그는 훗날 자신이 자란 기소 산맥을 따 성을 木曾|기소일본어로 바꾸었다.[2]

1180년 모치히토 왕이 다이라 씨 타도를 외치며 낸 령지(令旨)에 호응하여 1181년 거병하였고, 겐페이 전쟁에 참전하여 에치고 국 등 호쿠리쿠도 방면에서 다이라 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웠다.[3]

1183년, 사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잠시 화해하기도 했으나 곧 경쟁 관계에 들어섰다. 요시나카는 구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다이라노 고레모리가 이끄는 다이라 씨의 대군을 격파하고[3] 파죽지세로 교토로 진격하여 안토쿠 천황을 비롯한 다이라 일족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교토에 입성한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다이라 씨 추토 명령과 함께 '아사히 쇼군(旭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았다.[3]

그러나 교토에서의 거친 행동과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고시라카와 법황과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법황을 유폐시키는 강수를 두었다(호주지 전투). 이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요시나카 토벌을 명령했다.[3] 요시나카는 교토에서 밀려나 1184년 오미 국 아와즈(粟津)에서 벌어진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쓰네 군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3][2]

2. 1. 성장

가와치 겐지 일문으로 황태자의 태도 선생을 지낸 미나모토노 요시카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고마오마루'''(駒王丸). 생모는 유녀(遊女)로 전해진다. 요시나카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출생지는 아버지 요시카타가 거처를 두었던 무사시 국 오쿠라노타테(大蔵館, 현 사이타마현 히키군 란잔정)라는 전승[69][16]과 고즈케 국 다호군(多胡郡, 현 군마현 다노 군)이라는 설이 있다.

1155년(규주 2년), 아버지 요시카타는 형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대립하다 오쿠라 합전(大蔵合戦)에서 요시토모의 장남 미나모토노 요시히라에게 살해당했다.[1][5] 요시히라는 당시 두 살이었던 고마오마루마저 죽이려 했으나, 하타케야마 시게요시와 사이토 사네모리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고마오마루는 그의 유부(乳父, 젖아버지)인 나카하라노 가네토의 품에 안겨 시나노 국 기소 계곡(木曾谷, 현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정)으로 피신했다.[70][1][5]

이후 나카하라노 가네토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며 통칭 '''기소 지로'''(木曾次郎)라 불렸다. 그는 가네토의 아들이자 훗날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는 이마이 가네히라와 젖형제로 함께 자랐다. 훗날 요시나카는 자신이 자란 기소 산맥을 따 성을 미나모토에서 木曾|기소일본어로 바꾸었다.[2]

한편, 요시카타의 적남이자 요시나카의 이복형인 미나모토노 나카이에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교토로 가서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양자가 되었다. 스와 대사의 전승에 따르면, 요시나카는 한때 하사(下社)의 궁사(宮司)였던 가나사시 모리스미 아래서 수행했다고 한다. 훗날 테즈카 미쓰모리를 비롯한 가나사시 일족이 거병 초기부터 나카하라 일족과 더불어 요시나카의 핵심 세력이 된 점이 이 전승을 뒷받침한다. 『겐페이 조세이키』에는 "시나노 국 아즈미 군에 기소라는 산마을이 있고, 요시나카가 그곳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요시나카가 실제 숨어 지낸 곳은 현재의 기소 지역이 아니라, 당시 미노 국 나라이에 속했던 히가시치쿠마 군 아사히촌 기소베 가쓰라이리 부근이라는 설도 제기된다.[17]

2. 2. 거병

지쇼 4년(1180년), 황족 모치히토 왕이 전국의 겐지들에게 헤이케 타도를 명하는 령지(令旨)를 내렸다. 요시나카의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는 이 영지를 가지고 여러 (国)을 돌며 겐지들에게 거병을 호소했다. 요시나카의 형 나카이에는 하치조인구란도(八条院蔵人)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었는데, 5월에 양아버지 요리마사와 함께 모치히토 왕의 거병에 가담했다가 우지(宇治)에서 전사했다.

같은 해 9월 7일, 요시나카는 군사를 이끌고 시나노 북부의 겐지 일족 구원(이치하라 합전)에 나섰다가, 그대로 아버지의 옛 영지였던 다호군(多胡郡)이 있는 고즈케 국으로 향했다. 2개월 뒤 시나노 국으로 돌아와 오가타군(小県郡) 요다 성(依田城)에서 거병했다. 고즈케에서 시나노로 돌아간 것은 당시 요리토모를 지지하던 도세 아시카가 씨(藤姓足利氏)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18]

요시나카가 기소타니(木曽谷)에서 자랐으므로 그곳에서 거병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겐페이 성쇠기》에는 시게노 유키치카(滋野行親)가 기소타니 산 아래에서 병사를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71] 그러나 요시나카의 실제 근거지는 시게노 씨(滋野氏) 집안의 본거지였던 동부 시나노의 니시우에노(西上野)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히시누마 가쓰노리(菱沼一憲)는 뒤의 요코타 강변(横田河原) 싸움에서 요시나카 측에 가담한 기소타니 출신 무사 중 성씨가 명확한 이는 나카하라노 가네토오의 아들들뿐이며, 요시나카가 기소타니에서 거병했더라도 실제 본거지는 사쿠(佐久)・오가타(小県) 2군 및 니시우에노 일부 지역이었고, 이치하라 합전이나 요코타 강변의 싸움도 이를 전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쇼 5년(1181년) 6월, 요시나카는 오가타 군의 시라토리가와라(白鳥河原)에서 기소츄(木曾衆) ・ 사쿠츄(佐久衆, 히라가씨 등) ・ 소슈츄(上州衆, 또는 가이츄甲斐衆라는 설도 있음) 등 약 3천 기(騎)의 병력을 모았다. 그는 에치고 국(越後国)에서 쳐들어온 조 스케모치(城助職)의 군대를 요코타 강변에서 격파하고[3], 그대로 에치고를 거쳐 호쿠리쿠도(北陸道)로 진격했다. 주에이(寿永) 원년(1182년), 호쿠리쿠로 피신해 온 모치히토 왕의 아들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를 옹호하며 자신이 모치히토 왕의 거병을 계승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요리토모와 결탁하여 남부 시나노로 진출한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 등 가이 겐지(甲斐源氏)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요리토모와 노부미쓰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은 호쿠리쿠 방면으로 세력을 넓혔다.

주에이 2년(1183년) 2월, 요리토모와 대립하다 패한 숙부 시다 요시히로(志田義広)와 요리토모에게 쫓겨난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요시나카에게 의탁해오자 이들을 비호했다. 이 일로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헤이케 이야기》와 《겐페이 성쇠기》에는 다케다 노부미쓰가 자신의 딸을 요시나카의 적남(嫡男) 요시타카(義高)에게 시집보내려다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요시나카가 헤이케와 손잡고 요리토모를 치려 한다고 중상모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양측의 무력 충돌 직전에 화해가 이루어져, 3월에 요시타카를 인질로 가마쿠라에 보냄으로써 요리토모와의 대립은 일단 수습되었다.[5]

같은 해 4월, 헤이케는 교토의 군량 공급지인 호쿠리쿠도의 회복을 위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대장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헤이케 군은 에치젠 국(越前国)의 히우치 성 전투에서 승리하고[4] 가가 국(加賀国)으로 진격했다. 이에 요시나카는 이마이 카네히라에게 6천의 선발대를 주어, 헤이케 군의 타이라노 모리토시가 이끄는 선발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엣추 국(越中国)의 반냐노(般若野)를 기습하여 승리했다. 이 기습으로 헤이케 군은 엣추와 가가 국경의 도나미 산(礪波山) 구리카라 고개(倶利伽羅峠) 서쪽으로 물러났다.

5월 11일, 요시나카는 구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10만으로 추정되는 코레모리가 이끄는 헤이케의 호쿠리쿠 추토군(追討軍)을 격파했다. 이어 가가 국에서의 시노하라 전투에서도 승리한 요시나카 군은 승기를 타고 연도의 무사들을 규합하며 파죽지세로 교토를 향해 진군했다.[3] 6월 10일에는 에치젠 국, 13일에는 오미 국(近江国)을 거쳐 6월 말에는 교토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엔랴쿠지(延暦寺)와의 교섭에 들어갔다. 유필(右筆)이었던 다이후보 가쿠메이(大夫房覚明)에게 쓰게 한 첩장(諜狀)에서 요시나카는 "헤이케를 따를 것인가, 겐지를 따를 것인가? 만약 악한 헤이시를 돕겠다면 우리는 대중(大衆)과 싸울 것이요, 전투가 시작되면 엔랴쿠지는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다."라는 협박에 가까운 최후통첩을 보냈다. 실제로 7월 22일에는 동탑(東塔) 소지인(惣持院)에 성을 쌓았다. 이 무렵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이가(伊賀) 방면에서,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등 다른 겐지 세력들도 교토로 압박해 들어왔고, 셋쓰 국(摂津国)의 겐지 세력인 타다 유키츠나(多田行綱)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헤이케는 교토 방위를 포기하고 25일에 안토쿠 천황과 그의 이복 형제인 모리사다 친황(守貞親王)을 데리고 사이고쿠(西国)로 달아났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리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피신하여 헤이케를 따라가지 않았다.[3]

한편, 요시나카의 이름이 《교쿠요》(玉葉)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구리카라 고개 전투를 기록한 주에이 2년(1183년) 5월 16일 조이다. 그 직전인 4월 25일 조에서는 동국(東国)과 북국(北国) 반란의 중심으로 요리토모와 다케다 노부요시를 언급하고 있어, 당시 무위무관(無位無官)이었던 요시나카는 교토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요시나카의 상경이 임박한 7월 2일 조에서도 요시나카와 유키이에만이 상경하고 요리토모는 상경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저자인 구조 가네자네는 겐지 세력을 하나로 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훗날 교토에 입성한 요시나카를 요리토모의 대리인으로 보는 시각이 생기는 배경이 되었다.

2. 3. 요리토모와의 갈등

1183년, 요시나카는 사촌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게 되었다. 요리토모의 군대가 시나노에 진입하자 두 사람은 일단 화해하고 다이라 가문에 맞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요시나카는 아들 요시타카를 인질로 삼아 요리토모가 있는 가마쿠라로 보냈다.[5]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요시나카는 굴욕감을 느꼈고, 요리토모보다 먼저 교토를 점령하여 스스로 다이라 가문을 몰아내고 미나모토 씨의 주도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요시나카가 구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교토로 진격하자, 요리토모는 조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요시나카의 교토 입성과 거의 동시에 요리토모가 조정에 올린 신상서(申狀書)가 도착했는데, 여기에는 헤이시(平氏)가 빼앗은 신사와 사찰 영지의 반환, 황족 영지의 반환, 항복자에 대한 관용 등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정은 "하나하나의 신상서가 요시나카 등과는 다르다"[30]며 크게 기뻐했다. 1183년(쥬에이 2년) 10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리토모의 관위를 회복시키고 사면했으며, 14일에는 쥬에이 2년 10월 선지를 내려 요리토모에게 도카이도도산도 지역의 사실상 지배권을 인정했다.[31] 처음에는 호쿠리쿠도도 포함되었으나, 요시나카의 반발로 제외되었다.

한편, 요시나카는 교토 입성 후 서쪽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윤 10월 1일의 미즈시마 전투에서는 헤이시 군에게 크게 패하여 유력 무장인 야다 요시키요와 우노 유키히로를 잃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요리토모의 동생 구로(九郎)가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요시나카에게 전해졌다.[32][33] 이에 놀란 요시나카는 헤이시와의 전투를 중단하고 15일,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교토로 돌아왔다. 20일,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의 상락(上洛)을 촉구하고 그에게 선지를 내린 것에 대해 "생애의 한(生涯の遺恨)"이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34] 그는 요리토모 추토를 명하는 선지나 어교서(御敎書)의 발급[35], 그리고 시다 요시히로를 헤이시 추토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요시나카의 주적은 이제 헤이시가 아닌 요리토모가 되었다. 19일에 열린 겐지(源氏) 일족 회의에서 요시나카는 법황을 받들고 간토로 출진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나[36], 유키이에와 미나모토노 미쓰나가(源光長)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26일에는 고후쿠지의 승려들에게 요리토모 토벌 명령을 내렸지만[37], 이 역시 승려들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요시나카 휘하의 교토 수비군은 와해 상태에 이르렀고, 요시나카와 유키이에 사이의 불화도 공공연해졌다.[38][39]

결국 고립된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시키고 그의 거처인 호주지(法住寺) 궁을 불태우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이는 요리토모에게 요시나카를 토벌할 결정적인 명분을 주었다. 요리토모는 동생 요시쓰네노리요리에게 요시나카 토벌을 명령했다.[3]

2. 4. 교토 입성

1183년 구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다이라노 고레모리가 이끄는 헤이시 군대를 격파한 요시나카는 교토로 진격했다. 헤이시 일가는 어린 안토쿠 천황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주했다.[3]

같은 해 7월 27일,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와 협력 관계에 있던 야마모토 요시쓰네의 아들 니시키베 간자 요시타카의 호위를 받으며 교토로 귀환했다.[19] 《헤이케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지난 20여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겐지의 흰 깃발이 오늘 처음으로 수도에 들어온다"고 묘사하며 그 감회를 전하고 있다. 요시나카는 다음 날인 28일에 교토에 입성하여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와 함께 렌게오인으로 가서 법황을 알현하고 헤이시 추토 명령을 받았다.[3][19] 이 자리에서 요시나카와 유키이에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열 다툼을 벌였다고 전해지며[19], 그들의 남루한 행색은 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0]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와 힘을 합쳐 "무네모리와 그의 군대를 파멸시키라"는 칙령을 내렸다.[3]

7월 30일에 열린 구교 회의(公卿議定)에서는 헤이시 타도에 대한 훈공 순위가 논의되었는데, 제1 공로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제2는 요시나카, 제3은 유키이에 순으로 결정되었다.[21] 그러나 요시나카의 반대로 요리토모에 대한 포상은 보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요리토모의 모반인이라는 입장도 해소되지 않았다.[21] 이와 함께 교토의 치안 유지 책임이 요시나카에게 맡겨졌다. 요시나카는 교토로 들어온 동맹군 무장들을 수도 주변에 배치하고, 자신은 중심부인 구조(사쿄)의 수비를 담당했다.[22]

8월 10일에는 논공행상을 위한 관리 임명(除目)이 이루어져, 요시나카는 종5위하 사마노카미(左馬頭) 겸 에치고 태수(越後守)에, 유키이에는 종5위하 빈고 태수(備後守)에 임명되었다.[23]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아사히 쇼군(朝日將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3][24] 또한, 요시나카와 유키이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지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8월 16일(유키이에는 13일)에 요시나카는 겐지 가문과 연고가 있는 이요 태수(伊予守)로, 유키이에는 비젠 태수(備前守)로 변경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하지만 실제 기록상으로는 유키이에만이 요시나카와의 대우 차이에 불만을 표시했을 뿐, 요시나카가 임지에 불만을 가졌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24] 유키이에는 비젠 태수로 옮겨진 이후에도 요시나카와의 차이에 불만을 품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 5. 왕위 계승 문제 개입과 고립

고시라카와 법황은 헤이케에게 천황과 삼종신기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교토에 남아 있던 다카쿠라 상황의 두 황자, 산노미야(三之宮) 고레아키라 친왕(惟明親王)과 욘노미야(四之宮) 다카나리 친왕(尊成親王) 중 한 명을 새로운 천황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요시나카는 헤이케 타도의 가장 큰 공은 자신이 지지해 온 호쿠리쿠노미야에게 있으며, 모치히토 왕자가 헤이케의 방해가 없었다면 즉위했을 것이므로 그의 아들인 호쿠리쿠노미야가 즉위해야 한다고 히에이 산의 승려 슌료(俊堯)를 통해 조정에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적통 황자가 두 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왕의 아들에 불과한 호쿠리쿠노미야를 즉위시키자는 제안은 황통 계승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셋쇼(攝政) 구조 가네자네가 "왕자(王者)의 일은 법황께서 정하실 문제이지, 신하된 자가 어떻게 하라고 명할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듯이[25], 법황과 공경들은 일개 무사가 황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다. 조정은 요시나카를 견제하려는 의도 속에서 여러 차례 점을 친 끝에, 8월 20일 욘노미야 다카나리 친왕(훗날의 고토바 천황)의 즉위를 결정했다. 형인 산노미야 대신 욘노미야가 즉위한 데에는 법황의 총애를 받던 단고노 쓰보네의 영향이 컸다는 설도 있다.[26][27] 이 사건으로 요시나카는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법황과 공경들에게 궁중 정치나 문화에 대한 교양이 부족한 '무례한 자'라는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 산골에서 자라 교토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요시나카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또한 요시나카는 교토의 치안 유지에도 실패했다. 요와 기근으로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원정으로 지친 요시나카의 군사들이 교토와 주변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9월에는 "요즘 천하에 무사가 아닌 자는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렵다. 상하 많은 이들이 산골 마을 등으로 달아나고 있다. 사방이 막혀 기나이 인근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고 논밭도 남은 것이 없다. 교토 안의 산과 들, 신사, 사찰, 민가까지 모두 약탈당했다. 장원에서 올라오는 물품마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귀천 없이 모두 빼앗아 간다"(교쿠요 기록)[28]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치안이 악화되었다. 당시 교토 수호군은 요시나카 휘하의 부대뿐 아니라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야스다 요시사다, 오미 겐지, 미노 겐지, 셋쓰 겐지 등이 뒤섞인 혼성군이었기에 요시나카가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요시나카가 부하들의 약탈 행위에 대해 "도성 수호를 맡은 자가 말 한 필 길러 타는 것이나, 벼 좀 베어 말 먹이로 쓴 것을 법황께서 일일이 나무라시는가? 군량미가 부족해 병사들이 가끔 물건을 징발하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인가? 대신의 집이나 궁궐에 쳐들어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헤이케 이야기》는 이를 법주사 전투 직전의 발언으로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치안 문제가 심각했던 9월경의 발언으로 추정된다.) 요시나카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요시나카는 교토에서 점차 고립되었다.

결국 9월 19일,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를 불러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고 헤이시가 여전히 건재하니 모든 일이 불편하다"며 꾸짖었다.[29] 자신의 입지가 악화되었음을 깨달은 요시나카는 즉시 헤이시 토벌에 나서겠다고 아뢰었고, 법황은 직접 검을 하사하며 출진을 명했다. 요시나카로서는 실추된 신용을 회복하고 군량 등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과를 올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심복인 히구치 가네미쓰를 교토에 남겨두고 하리마국으로 출정했다. 이는 요시나카 군의 난폭한 행동에 염증을 느낀 고시라카와 법황이 그를 교토에서 내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시나카가 교토를 비우자마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서신이 도착했다. 헤이케가 황족과 사찰에서 빼앗은 영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항복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내용은 조정의 호평을 받으며 요시나카와 비교되었다. 10월 9일, 법황은 요리토모의 관위를 회복시켜 주었고, 14일에는 이른바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내려 도카이도도산도 지역에 대한 요리토모의 사실상 지배권을 인정했다.

한편, 서쪽 전선에서 헤이케를 상대로 고전하던 요시나카는 윤10월 1일 미즈시마 전투에서 유력 무장인 야다 요시키요를 잃는 등 패배를 겪었다. 요리토모의 동생이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에 놀란 요시나카는 헤이케와의 전투를 중단하고 10월 15일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교토로 급히 돌아왔다. 20일, 요시나카는 법황이 요리토모의 상경을 재촉하고 그에게만 선지를 내린 것에 대해 "생애 가장 큰 한"이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는 요리토모 추토를 명하는 선지와 함께 시다 요시히로를 헤이시 추토사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요시나카의 주적은 이미 헤이케가 아닌 요리토모로 바뀌어 있었다. 19일에는 겐지 일족 회의에서 법황을 받들고 간토로 진군하자는 안까지 내놓았지만, 고후쿠지 승병들에게 요리토모 토벌을 명하려던 시도(26일)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와 도키 미쓰나가 등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 시점에서 요시나카 휘하의 교토 수호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유키이에와의 불화도 깊어지는 등 그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

2. 6. 호슈지도노 습격과 괴뢰 정권 수립

10월 22일,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이세 국에 도착했다. 그의 목적이 요시나카 추토가 아니라 10월 선지(宣旨)를 각지에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40] 11월 4일, 요시쓰네의 군대가 후와노세키까지 이르자,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의 군대와 결전을 벌일 각오를 다졌다.[41] 11월 7일, 요시쓰네는 오미 국에 도착했지만, 500~600기 정도의 소수 병력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헌상할 공물을 가져온 사자로 여겨졌다.[41]

한편, 요리토모 군의 입경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힘을 얻은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를 교토에서 축출하기 위해 전력 증강을 꾀하기 시작했다. 요시나카는 요시쓰네의 병력이 소수라면 입경을 허가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42], 법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황은 엔랴쿠지와 온조지의 협력을 얻어 승병과 석투(石投) 부랑민 등을 모으고, 해자와 울타리를 둘러 호주지 전(法住寺殿)을 무장화했다. 더욱이 요시나카 진영의 셋쓰 겐지(攝津源氏)와 미노 겐지(美濃源氏)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수적으로 요시나카 군을 능가하게 되었다.

법황 측 무력의 중심이었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는 이 중대한 국면에서 헤이시(平氏) 추토를 명분으로 11월 8일에 교토를 떠났다.[43]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한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즉시 헤이시 추토를 위해 서쪽으로 내려가라. 인선(院宣)을 어기고 요리토모 군과 싸우겠다면, 선지(宣旨) 없이 요시나카 개인의 자격으로 행하라. 만약 교토에 머무른다면 모반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으로, 요시나카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혹한 것이었다.[44]

이에 대해 요시나카는 "임금(법황)을 배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요리토모 군이 입경하면 싸울 수밖에 없지만, 입경하지 않는다면 서국(西國)으로 내려가겠다"라고 답변했다. 구조 가네자네는 자신의 일기 《교쿠요》(玉葉)에서 "요시나카의 신청은 온건한 것이며, 원(院)의 근심은 법도를 지나친 것으로 왕자(王者)의 행동이 아니다"라며 요시나카를 옹호하고 법황의 처사를 비판했다.[45] 요시나카의 답변에 법황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1월 18일에 고토바 천황, 슈카쿠 법친왕, 엔에 법친왕, 덴다이 좌주 묘운 등이 어소(御所)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법황은 요시나카에 대한 무력 공격의 결의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2. 7. 최후

주에이 3년(1184년) 1월, 가와치국 나가노 성에 웅거하며 반기를 든 유키이에를 토벌하기 위해 요시나카는 히구치 가네미츠를 파견했다. 그러나 6일에는 노리요리가 이끄는 요리토모 군이 스노마타를 넘어 미노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요시나카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노리요리 군은 요시쓰네의 선발대와 합류했고, 평씨(平氏) 가신인 히라 노부카네, 이세의 평씨 일족 외에도, 원래 요시나카 군에 가담했던 야스다 요시사다와 아시시키 시게타카까지 요리토모 군에 합류하면서 요시나카의 지지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11일에는 요시나카는 스스로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하게 했으나[6],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요시나카는 평씨와의 화목 공작이나 고시라카와 법황을 데리고 북국으로 내려가는 것을 모색했지만, 수만 명에 달하는 노리요리, 요시쓰네 등이 이끄는 요리토모 군이 눈앞에 다가와 개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법황 유폐에서 시작된 일련의 행동으로 이미 인망을 잃은 요시나카를 따르는 병사는 거의 없었고, 우지 강과 세타에서의 싸움(우지가와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싸움에서 패한 요시나카는 이마이 가네히라 등 몇 명의 가신과 함께 도망쳤지만, 1월 21일, 오미 국 아와즈(현재의 시가현 오쓰시)에서 벌어진 아와즈 전투에서 사촌인 요시쓰네 군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3] 그의 향년은 31세였다. 구조 가네자네는 "요시나카가 천하를 잡은 지 60일이 지났다. 노부요리의 전례와 비교하면, 오히려 그 늦음을 생각하게 한다"(『교쿠요』 동월 동일 조) 라고 평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밤이 깊어지고 많은 적군에게 추격당하면서 그는 고립된 장소를 찾아 자결하려 했으나,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 얼어붙은 진흙밭에 갇히게 되었고, 적들이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2]

1월 26일, 검비위사는 교토의 시치조 강변에서 요시나카와 그의 가신 다카나시 다다나오, 가네히라, 네이 유키치카 등의 목을 효수했다(『아즈마카가미』).

『헤이케 이야기』에는, 요시나카가 어릴 적부터 고락을 함께 해 온 토모에 고젠과의 이별, 이마이 가네히라와의 마지막 대화 등, 토모에와 가네히라가 요시나카에게 보인 충성심과 주종 간의 아름다운 유대가 묘사되어 있다.

요시나카가 전사했을 때 적남 요시타카는 요리토모의 딸 오히메의 사위로서 가마쿠라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치려다 요리토모에게 살해당했다.[5] 이로써 요시나카의 직계 가계는 끊어졌다고 여겨지지만, 여러 설이 있으며, 센고쿠 시대다이묘인 기소 씨는 요시나카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다.

3. 유산

주에이 3년(1184년) 1월 20일, 요리토모가 보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미나모토노 요시쓰네 군대와의 아와즈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미국 아와즈(현 시가현 오쓰시)에서 전사하였다. 향년 31세였다. 요시나카의 적자 요시타카는 당시 가마쿠라에 있었으나, 요리토모의 명령으로 처형되어 요시나카의 직계는 끊어졌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였던 기소씨는 요시나카의 후손을 자칭하였다.

요시나카의 묘 (기추지, 시가현 오쓰)


요시나카의 묘소는 그의 사망지 근처인 시가현 오쓰시 바바의 아사히산 기추지(義仲寺)에 있다. 기추지는 무로마치 시대에 요시나카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다. 에도 시대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는 생전에 요시나카를 흠모하여 그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고, 유언에 따라 기추지 경내 요시나카 묘 옆에 안장되었다[65]. 그의 충신이었던 이마이 가네히라의 묘도 오쓰에 있지만, 요시나카의 묘와는 떨어져 있다.

이 외에도 요시나카와 관련된 묘소나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호칸지(法観寺)에는 요시나카의 수총(首塚, 머리 무덤)이 있다. 교토에서 효수된 그의 머리를 후에 이곳 근처에 매장했다가 옮긴 것이다.
  •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정 히요시의 도쿠온지(徳音寺)에는 요시나카의 영묘와 함께, 그의 충신이었던 히구치 가네미쓰, 도모에 고젠, 이마이 가네히라 등의 묘가 함께 세워져 있다.
  •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정 후쿠시마의 고젠지(興禅寺)에는 요시나카와 기소씨 관련 인물들의 묘 세 기가 나란히 있으며, 기소 씨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마가타 하치만구(사이타마현 히키군 란잔정)


기소 요시나카 산유 시미즈(가마가타 하치만구 본전 석단 우, 석비에 각자)


요시나카는 가마쿠라 시대의 대표적인 군기 문학 작품인 ''헤이케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특히 그와 충신 이마이 가네히라의 비극적인 최후 이야기는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能)극 ''가네히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노극은 가네히라의 고뇌하는 유령이 나타나 자신과 주군 요시나카의 죽음을 회상하며 저승으로 가기를 갈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소 요시모토는 요시나카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며, 아버지 사후 아즈미 군의 호족 니시나씨에게 몸을 의탁하여 소야마 신명궁(나가노현 오마치시 야사카)에서 보호받았고, 후에 기소 계곡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전승이 있다.[66] 군마현 시부카와시 기타타치바나마치 하코다의 기소 3주신사에는 요시모토와 그의 동생 요시무네가 요시나카 사후 유모에게 맡겨져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전승도 있으나, 신빙성은 낮게 평가된다.[67] 에도 시대에는 오쿠 의사(奥医師)였던 아시하라 겐교(葦原検校, 기소 요시나가)가 요시나카의 후손을 자칭하며 기소 씨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다.[68]

기소 가문의 가문 문장으로는 용담 문장과 구요 문장(九曜紋)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평가


  • '''용모''': 『겐페이 성쇠기』에 따르면 "눈썹과 눈매가 깨끗하고 미남이었지만, 완고한 시골 사람이어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완고하고 우스웠다", "피부가 하얗고 눈썹과 눈매는 좋은 남자였지만, 행동거지가 촌스럽고, 하는 말의 어조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고 묘사된다.
  •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도쿄부립 제3중학교 재학 시절에 쓴 『기소 요시나카론』에서 요시나카를 직설적이고 강직한 "기소 산간의 야인"이자 동시에 "적성의 사람", "열정의 사람", "혁명의 선동자"로 평가했다. 또한 그의 삶을 "그의 일생은 실패의 일생이다. 그의 역사는 좌절의 역사이다. 그의 일대는 박행의 일대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남자다운 생애이다"라고 요약하며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63][64]

5. 대중문화


  • 페이트/그랜드 오더 타임라인에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아처 클래스 서번트인 토모에 고젠의 연인으로 등장한다. 게임 페이트/사무라이 렘넌트에서 처음으로 로구 세이버 클래스 서번트로 소환되며, 그의 배경 이야기는 토모에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 평론
; 소설

  • 단 가즈오 『기소 요시나카』(1955년 지쿠마 서방)
  • 마쓰모토 도시아키 『기소 요시나카』(1993년 고분샤 문고)
  • 야마다 도모히코 『기소 요시나카』(1999년 일본방송협회)
  • 오가와 요시아키 『기소 요시나카 「아사히 쇼군」이라고 칭송받은 겐지의 호걸』(2004년 PHP 문고)
  • 아마노 준키 『맹렬한 아침』(2023년 주오코론 신샤)

; 영화

  • 『신 헤이케 이야기 요시나카를 둘러싼 세 명의 여자』(1956년 다이에이 감독: 기누가사 사테이 주연: 하세가와 가즈오)

; 텔레비전 드라마

  • 『무사시보 벤케이』(NHK, 1986년, 연기: 사토 코이치)
  • 『요시츠네』(NHK 대하드라마, 2005년, 연기: 오자와 유키요시)
  • 『가마쿠라 시대의 13인』(NHK 대하드라마, 2022년, 연기: 아오키 무네타카)

; 교양 프로그램

  • 영웅들의 선택 『지방의 분노, 도쿄를 제압하다! ~기소 요시나카의 야망과 좌절~』(2019년 2월 21일 NHK BS 프리미엄)

; 가요

  • 미나미 하루오 「기소 요시나카 일대기」(1994년 테이치쿠 엔터테인먼트)

; 컴퓨터 게임

  • 『겐페이 합전』(코에이)
  • 『푸른 늑대와 하얀 암사슴·원조 비사』(코에이)

참조

[1]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2]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3]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5]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6] 문서 頼朝の征夷大将軍任官をめぐって 明月記研究
[7] 서적 尊卑分脈
[8] 서적 源平盛衰記
[9] 서적 尊卑分脈
[10] 서적 戦国・織豊期と地方史研究 岩田書院
[11] 서적 木曾義仲 筑摩書房
[12] 간행물 平家物語の性格造型手法―平重盛・木曾義仲の表現をめぐって― 解釈
[13] 간행물 木曾義仲と項羽―国文学と漢籍その一― 解釈
[14] 서적 朝日将軍木曾義仲 国書刊行会
[15]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16] 문서 義賢が関東に下り最初に居住した上野国多胡郡(現・群馬県多野郡)の可能性もある
[17] 문서 義仲と松本平―旭将軍義仲とその子清水冠者義高 松本市歴研刊行会
[18] 간행물 木曽義仲挙兵の基地としての東信地方 千曲
[18] 간행물 木曽義仲の挙兵と市原・横田河原の合戦 群馬歴史民俗
[18] 서적 中世地域社会と将軍権力 汲古書院
[19] 서적 玉葉
[20] 서적 吉記
[21] 서적 玉葉
[22] 서적 吉記
[23] 서적 百錬抄, 玉葉
[24] 서적 玉葉
[25] 서적 玉葉
[26] 서적 玉葉
[27] 문서 三之宮が丹後局と寵愛を競う坊門局(平信重の娘・円恵法親王の生母)の姪孫であったことも影響が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
[28] 서적 玉葉
[29] 서적 玉葉
[30] 서적 玉葉
[31] 서적 百錬抄
[32] 서적 玉葉
[33] 서적 玉葉
[34] 서적 玉葉
[35] 서적 玉葉
[36] 서적 玉葉 閏10月20日
[37] 서적 玉葉 閏10月26日
[38] 서적 玉葉 閏10月27日
[39] 문서 의중을 따른 것은 자식과 같은 부하를 제외하고, 시다 요시히로와 오미 겐지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의중 멸망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지만, 겐랴쿠 원년(1184년) 5월 4일에 가마쿠라 군과의 전투에서 토벌된다. 오미 겐지의 야마모토 요시쓰네는 법주사 합전 후에 와카사 수호에 임명되지만, 그 후의 소식은 불명이다.
[40] 서적 玉葉 10月22日
[41] 서적 玉葉 11月7日
[42] 서적 玉葉 11月16日
[43] 서적 玉葉 11月8日
[44] 서적 玉葉, 吉記, 百錬抄 11月17日, 11月18日
[45] 서적 玉葉 11月18日
[46] 서적 玉葉 11月22日
[47] 서적 愚管抄
[48] 서적 百錬抄, 吉記 21日
[49] 서적 平家物語, 玉葉, 愚管抄
[50] 서적 吉記, 百錬抄, 玉葉 29日
[51] 서적 玉葉, 吉記 28日
[52] 서적 平家物語
[53] 서적 吉記
[54] 문서 헤이지의 난 이후, 인원묘별당과 좌마두는 헤이시 일문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0일에는 좌마두를 사임하고 있다. 동일 인물이 양쪽 직책을 겸임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 선례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55] 서적 百錬抄, 吉記
[56] 서적 吉記
[57] 간행물 木曾義仲関係史蹟を歩く 鈴木彰・樋口州男・松井吉昭編著『木曾義仲のすべて』新人物往来社 2008
[58] 웹사이트 弓の清水 https://www.takaoka.[...] 高岡市観光協会・高岡市観光交流課 2022-04-17
[59] 웹사이트 弓の清水 https://www.info-toy[...] 富山県地方創生局観光振興室・とやま観光推進機構 2022-04-17
[60] 뉴스 とやまの公園空中散歩 中田中央公園(高岡市常国) 2018-05-08
[61] 뉴스 義仲像すっきり 小矢部・埴生護国八幡宮、おみぬぐい https://www.hokkoku.[...] 2021-12-14
[62] 서적 徹底ガイド!北陸新幹線まるわかりBOOK マイナビ
[63] 웹사이트 木曽義仲論 https://www.aozora.g[...]
[64] 웹사이트 芥川龍之介が3万字論文書いた「木曽義仲」の魅力 松尾芭蕉も愛惜した猛将の知られざる実像 https://toyokeizai.n[...] 東洋経済オンライン 2022-03-21
[65] 웹사이트 木曽義仲と松尾芭蕉のお墓がある滋賀県の義仲寺 https://allabout.co.[...] ALL About 2012-08-14
[66] 서적
[67] 서적 今井善一郎著作集 煥乎堂 1977-01-10
[68] 논문 葦原検校の遺跡と木像 http://jsmh.umin.jp/[...] 2005
[69] 문서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県) 히키 군(比企郡) 아라시야마 정(嵐山町)
[70] 문서 나가노 현(長野県) 기소군(木曽郡) 기소초(木曽町)
[71] 문서 지금의 기소초(木曽町) 신카이우에다(新開上田) 부근
[72] 문서 전후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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